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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시립교향악단 225회 정기연주회 2017 송년음악회 쇼스타코비치 교향곡7번 레닌그라드 티켓오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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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시립교향악단 225회 정기연주회 2017 송년음악회 쇼스타코비치 교향곡7번 레닌그라드
2017년 12월 27일(수) 오후 07:30
한국소리문화전당(모악당)

R석 : 10,000원 / S석 : 7,000원 / A석 : 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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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휘 _ 최 희 준
지휘자 최희준은 베를린 한스 아이슬러 국립음대 지휘과에서 디플롬과 최고연주자 과정(Konzertexamen)을 졸업하고, 드레스덴 국립음대에서 개교 이래 최초로 지휘과 최고연주자 과정(Meisterklasse)을 졸업하였다. 그는 2003년 독일 전 음대 지휘 콩쿠르(Deutsche Hochschulwettbewerb)에서 심사위원 전원만장일치로 1위, 2005년 바트 홈부르크(Bad Homburg)지휘 콩쿠르에서 1위를 차지하였다. 최희준은 그간 베를린 심포니(Berliner Sinfonie Orchester), 예나 필하모니(Jena Philharmonie), 카셀 (Staatsorchester Kassel), 브란덴부르크(Brandenburgisches Staastsorchester), 라인란트 팔츠(Staatsorchester Rheinland-Pfalz) 등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였으며 뮌헨 국립 가극장, 하이델베르크 오페라 하우스, 안나베르크 오페라 하우스 등에서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를 비롯한 다수의 오페라 공연을 성공적으로 지휘하였고 라인스베르크 궁 가극장에서 Joern Arnecke의 Drei Helden (세 영웅)을 초연하며 베를린의 주요 일간지인 Berliner Morgenpost로부터 “연주자들에게 영감을 불어넣는 지휘”라는 호평을 받았다. 또한 오더-슈프레(Oder-Spree) 오페라 페스티벌에서 모차르트의 오페라 <후궁으로부터의 도주>의 총감독 및 지휘를 맡았으며, 작센 주립극장의 카펠마이스터로서 다수의 오페라와 발레를 지휘하였다. 국내에서는 서울, 부천, 대전, 광주, 대구시립교향악단 등을 객원지휘 하였고, 제41회 난파음악상을 수상하였다.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예술감독 겸 상임지휘자를 역임하였고, 현재 한양대학교 지휘전공 교수로 재직 중이며 2015년 2월 전주시립교향악단 제7대 음악감독 겸 상임지휘자로 취임하였다.


program

D. Shostakovich / Symphony No.7 in C Major, Op.60 'Leningrad’
쇼스타코비치 / 교향곡 7번 다장조, 작품.60 ‘레닌그라드’
Ⅰ. Allegretto
Ⅱ. Moderato(poco allegretto)
Ⅲ. Adagio
Ⅳ. Allegro non troppo


program note
Dmitri Schostakowitsch Dmitri Shostakovich(1906~1975)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페테르스부르크에서 기사 집안에 태어나 어머니로부터 피아노를 배우고 일찍부터 음악적 재능을 나타냈다. 11세 때부터 글랴세르(Glyaser) 음악 학교에서 정규로 배우고, 1919년(13세) 페트로그라드 음악원(Petrograd Conservatory)으로 옮겨 피아노와 작곡을 공부했다. 1925년의 졸업 작품 「교향곡 제1번」은 그 현대적인 감각과 풍부한 색채 감각 때문에 세계적인 주목을 모으면서 ‘러시아가 낳은 최초의 천재’, ‘현대의 모차르트(오스트리아)’ 등으로 불리며 그의 이름은 널리 알려졌다. 졸업 후에는 피아니스트로서 활약하는 한편, 구소련 현대 음악 협회의 지도자로서 서구의 새로운 경향의 음악을 열심히 연구하고, 그 영향을 받은 몇 개의 작품을 완성했다.

당시의 작품으로는 고골리(Gogol’)의 원작에 의한 오페라 「코 Nos」(1928), 발레 음악 「황금 시대 Zolotoy vek」(1930) 등이 호평이었다. 또한 영화 음악 분야에도 적극적으로 진출했는데, 이 무렵부터 소련 음악계에는 이른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정책이 수립되고 민족적인 형식과 사회주의적인 내용을 가진, 이해하기 쉽고 건설적인 음악이 요구되었다. 1936년(30세)에는 이 견지에서 그의 형식주의적 작풍 경향이 비판을 받고 창작 태도의 변경을 요구받았다. 쇼스타코비치(러시아)는 그 이후 철저히 자기 비판을 하고, 그 대표적 걸작인 「교향곡 제5번」, 「교향곡 제6번」(1939)을 완성하여 구소련 건국 20주년 기념에 발표하여 절찬을 받았다.

1937년부터 1941년까지 레닌그라드 음악원 교수를 지냈는데, 이 동안에 명작 「피아노 5중주곡」(1940)으로 제1회 스탈린 상을 수상했다. 1941년(35세) 독 · 소전이 일어나자 그는 지원하여 레닌그라드 방위의 제1선에 섰고, 이 경험을 살려서 쓴 「교향곡 제7번」(1941)에 의해 재차 스탈린 상을 받았다. 1943년부터 1948년까지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로서 후진을 지도했으며 1945년(39세)에는 「교향곡 제9번」을 발표했는데, 그 신고전주의적인 양식은 ‘타락한 서양 부르주아지의 형식주의’라 하여 지다노프 비판의 표적이 되어 쇼스타코비치(러시아)는 또다시 자기비판을 했다.

이윽고 오라토리오 「숲의 노래」(성악곡)와 영화 음악 「베를린 함락 Padeniye Berlina」(모두 1949)에 의해 세 차례 스탈린 상을 수상한 이후는 창작 활동과 함께 사회 활동가 · 평론가로서도 눈부신 업적을 거두었다. 1952년(46세) 합창 모음곡 「10개의 시」에 의해 네번째의 스탈린 상을 수상하고 1953년에는 「교향곡 제10번」의 평가를 둘러싸고 평론가, 작곡가의 대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다시 1954년에는 창작과 사회 활동의 양면의 공적에 의해 세계 평화 의회로부터 국제 평화상을 받았다.

쇼스타코비치(러시아)의 음악은 러시아 예술 음악의 전통적 과제인 민족적인 내용과 서구적인 형식이라는 두 개의 요소의 투쟁 속에서 형성되어 갔다. 그 작풍은 종종 형식주의로의 경향을 강화해서 비판을 받아 왔는데, 많은 걸작을 낳은 러시아의 최대 작곡가도 또한 그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대표작으로는 그 밖에 「피아노 협주곡 제2번」(1957), 「바이올린 협주곡」(1947), 「첼로 협주곡」(1959) 등이 있다.



D. Shostakovich / Symphony No.7 in C Major, Op.60 'Leningrad’
쇼스타코비치 / 교향곡 7번 다장조, 작품.60 ‘레닌그라드’

교향곡 「레닌그라드」는 작곡자에게 1942년 스탈린상을 안겨주었다. 인민의 애국심과 소련의 자긍심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는 것이 수상의 이유였다. 하지만 작곡가 자신은 이를 '진혼곡'이라고 못박았다. 소련 찬가 혹은 혁명 만세를 노래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물론 '레닌그라드'라는 수식어를 전쟁과는 무관한 표제, 즉 창작자의 생각을 표현한 상징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진혼곡'과 '레닌그라드'를 연결해보면 쇼스타코비치의 말을 그리 가볍게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특히 작곡자 자신의 생애와 당시 도시의 처지를 연결할 때 더욱 그렇다.

1906년생인 작곡가는 제1차 세계대전기의 혼란과 혁명과 내전을 경험하며 성장했다. 하지만 옛 음악가들로부터 양분을 공급받은 그의 자질은 이미 19세 때의 졸업 작품인 교향곡 1번을 통해 세계 음악계로부터 '현대의 모차르트', '소련이 낳은 최초의 천재'라는 칭송을 들었을 만큼 두드러졌다. 약관 22세에 그가 첫 오페라로 선보인 작품은 고골리의 소설에 기초해 작곡된 「코」였다. 허위와 위선을 풍자한 곡이다. 이어 28세 때인 1934년에 역시 풍자적 오페라 작품 「므첸스크의 맥베드 부인」을 발표해 국내외의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1936년에 이 천재음악가는 '맥베드 부인'에 대한 스탈린의 비판적 시선으로 인해 '음악이 아니라 혼돈'이라는 당의 공식 비판에 직면했다. 레닌그라드 정치계와 문화계에 대한 대숙청의 파고가 그에게까지 밀어닥친 것이었다. 전 도시를 휘몰아친 저주어린 정치적 홍수의 고난을 격심한 고통과 더불어 몸소 경험하면서 작곡가의 전반적인 창작활동도 극도의 침체 속으로 빠져들었다.

1941년에 그는 자신의 도시가 나치즘에 의해 자행된 대테러의 파고에 휩쓸려갈 위기를 맞고 있음을 목도하게 되었다. 이때 그에게 있어 '레닌그라드'는 나치의 자존심을 꺾어줄 '스탈린그라드'가 아니었다. 포위된 레닌그라드는 스탈린에 의해 이미 철저히 파괴된 고아와 같았고, 그나마 히틀러의 최후 타격에 마지막 호흡마저 꺼져가는 중이었다. 따라서 작곡자는 7번 '진혼곡'을 통해 자신과 짓밟힌 도시를 애도하는 울음을 터뜨린 것이었다.

온 도시가 함께 통곡하며 죽은 자들과 절망의 도시를, 사형 언도를 받은 문화를 애도했다. 그런데 그 눈물이 절망의 가슴으로부터 두려움과 패배감을 닦아내고 용기와 생명을 부여했다. 메마른 땅에 퍼붓는 생수가 도시민들에게 긍지와 자존심을 소생시켰다. 결연히 일어선 이 도시는 음악을 연주하고 시를 읽으며, 폭격으로 깨진 에르미타쉬 궁의 유리와 파편들을 제거하며 이후 17개월의 봉쇄를 버텨냈다.

기약 없는 900일의 봉쇄를 이겨낸 시민들의 영웅적인 힘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각자에게 부여된 고통의 분량을 남에게 전가하지 않고 버텨내는 자존심으로부터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도시민의 인내는 이전의 역사를 통해 훈련되고 개인의 삶 속에서 연습되었다. 도시 건설 자체부터가 인내의 결실이며, 이 도시에서 삶을 영위하는 것 자체가 인내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어떻게 인내를 억지로 요구할 수 있으랴.

자신의 판단과 의지에 대한 확신과 자긍심이 없다면 끊임없는 고난을 참아낼 수가 없다. 전쟁 중에 발휘된 시민적 자존심의 한 예를 상허는 『소련기행』에서 이렇게 전한다. "야음을 이용하는 「라도가」호의 실낱같은 식량선으로도 정부로부터는 '학자와 예술가들의 식량'이란 것이 따로 전달되었고, 하루 120그램의 배급빵을 가지고도 이를 먹지 않고, '치스타코위치'라는 작곡가의 방전체험(防戰體驗)의 작품, 그의 제7번 연주회에 들어가려 입장권과 바꾼 사람이 있다는 미담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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